티스토리 뷰

목차



     

    <러브레터>를 처음 본 것은 어느 대학교 작은 영화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5년 일본에서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당시 한국 개봉관에서 볼 수 없어 비공식적인 통로로 공유되면서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켰었다. (한국에서는 1999년에서야 정식 개봉하였다.) 오랜 기간 마치 첫사랑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이 영화를 얼마 전 딸아이와 함께 보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이와이 슌지 감독만의 이야기 전개와 감성은 다시금 놀라웠다. 이제는 클래식이 되어버린 이 영화의 사랑을 비워내니 발견되는 첫사랑을 담은 두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얘기해 보려 한다.

     

     

    1. 한 남자에 대한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

    히로코는 조난 사고로 잃어버린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의 옛주소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답장을 받게 된다. 죽은 약혼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과 편지를 나누며 그와 얽힌 기억과 감정의 단면들을 펼쳐낸다. 히로코와 두 명의 이츠키는 죽음과 편지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편지를 통해 두 가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의 사랑은 온 세상을 덮은 하얀 눈과 같이 가슴이 시리고 또 하나의 사랑은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처럼 파릇파릇하다. 그 감성들을 풀어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시간을 오가는 편집으로 완성되는 스토리텔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너무 감각적이다. 두 인물이 주고받는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잃어버린 사랑을 재발견하는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 사이로 보이는 책을 읽는 소년 이츠키를 담은 장면은 여전히 설렌다. 완벽하게 소녀 감성을 사로잡는 이와이 슌지의 연출의 힘은 시대를 초월한다.

     

     

    2. 잘 지내고 있나요? 사랑을 비워내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사랑과 상실, 그리움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물이다. 지나가버린 인연을 놓지 못해 새로운 만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에 갇혀 있다. 히로코의 편지는 그녀와 두 이츠키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다. 그리움으로 편지를 쓰고 잘못 전달된 편지가 이어지면서 히로코는 연인 이츠키에 대해 질문하지만 돌아온 것은 소녀 이츠키와 소년 이츠키의 추억이었다. 그토록 놓아주지 못했던 연인이 애초에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자신에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또 다른 이츠키를 찾아가는 여행은 오히려 연인 이츠키를 비워내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일본 오타루의 겨울 풍경은 아름답지만 시리고 서글퍼서 히로코의 정서적 풍경을 반영한다고 느껴졌다.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 그곳에 가서 잘 지내냐는 인사를 토해내며 비로소 마음속 상처들을 비워낸다. '오겡끼데스까'로 너무나도 유명한 그 장면은 압도적인 슬픔이 치유되는 순간을 너무 아름답게 담아냈다. 히로코는 이츠키의 편지로 공유받았던 추억들을 돌려보내며 말한다. "이 추억들은 모두 당신 거예요". 애초에 히로코는 답장을 기대하며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눈 덮인 산에서 외쳤던 그 인사와 답이 히로코의 첫 편지에 그대로 적혀 있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아마도 편지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첫사랑을 발견하다

    사실 러브레터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편지를 통해 히로코가 접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학창시절 동명이인 여자아이를 향한 러브스토리이다. 영화 내용도 두 이츠키들의 스토리가 주가 된다. 여자 이츠키는 히로코의 편지를 받고서야 중학교 시절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를 기억해 냈다. 히로코와 두 이츠키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매개체는 죽음이다. 이츠키에게 죽음은 망각의 도구였다. 소녀 이츠키는 아빠의 죽음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봉인한 것 같다. 소녀 이츠키가 상중에 있는 소녀 이츠키를 만나러 가서 미처 반납하지 못한 책을 건네는데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히로코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 기억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같다. 히로코의 부탁으로 시작된 추억 여행은 어느새 이츠키 본인을 찾아가는 여행을 한다. 두 이츠키가 함께 다녔던 학교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해 비로소 듣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후배들의 게임 속에서 숨겨져 있던 소년 이츠키의 마음을 알게 된다. 도서관에서 그가 대여한 책들에 적힌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를 향한 마음의 표시였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소녀 이츠키는 알게 된다. 소년 이츠키가 반납을 부탁했던 그 책은 마르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7권 "되찾은 시간"이다. 그리고 후배들이 가져다준 그 책의 도서카드에는 소녀 이츠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눈 덮인 얼음 아래 잠자리처럼 초상화로 봉인되어 있던 소년 이츠키의 마음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되찾게 되었다. "가슴이 아파 이 편지는 차마 보내지 못하겠어요." 히로코에게 전하는 말은 그랬지만 첫사랑을 알아채버린 이츠키는 활짝 웃고 있었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보편성은 오래도록 이 영화가 사랑받는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문화적 배경이나 개인사, 세대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첫사랑과 관련된 기쁘고 아팠던 감정들을 떠올릴 수 있다. 러브레터의 스토리텔링은 사랑과 상실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끄집어 내 시청자들도 잊고 지냈던 시간들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게 만든다. 그 시절 많은 이들에게 열광을 받았고 여러 번의 재개봉과 재평가를 거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 영화가 얼마나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응형